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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08 Air project 공동워크숍

시선과 권력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유미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 남자들의 어정쩡한 미소가 포착되어 있다. 그들은 주로 운전사나 수위처럼 인사를 자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로, ‘아줌마’만큼이나 비호감의 느낌을 주는 ‘아저씨’들이다. 올 3월 갤러리 킹에서 열린 첫 개인전 부제인 ‘친절한 인사’는 결코 친절해 보이지 않는 미소 속에 담겨진 어색함을 그린 바 있다. 작품 [반장 경비 아저씨의 친절한 인사](2006)는 푸른 제복에 빨간 모자를 쓴 인물인데, 푸른 제복과 모자 사이에 낀 얼굴의 눈은 가려져 있지만, 인사하는 몸짓과 달리 입가에 머금고 있는 표정이 사뭇 냉소적이다. 모자와 제복의 생경한 색에 눌려 있지만, 얼굴은 동양화의 섬세한 묘사법으로 구현된다. 먹빛 얼굴은 각질로 두터워지고 거무튀튀하게 변해 버린 중년 남자의 피부색과 오히려 닮아있다.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과 달리, 원색으로 칠해진 모자는 마치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무궁화와 월계수, OOO 시스템 그리고 친절이라는 로고가 새겨진 모자는 인물의 부속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많은 직업인들이 그렇듯이, 인물은 시스템의 상징인 제복 뒤에 숨어있다. 정유미의 작품에 등장하는 50-60대의 아저씨들은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성장했으나, 이제는 누구나에게 친절해야만 하는 현대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함으로 정서적 괴리감을 가진다. 그들은 구호처럼 친절이란 단어를 머리에 붙이고 살지만, 내면까지 바꿀 수 없다. 그들의 이중성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친절해야만 하는 것이지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제복도 완전한 방패막이 되지 못한다. 무채색, 또는 노랑, 파랑 등으로 칠해진 제복들은 그다지 권위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작품 [저 이래 뵈도 반장 경비입니다](2008)에서는 화면 가득히 모자만 클로즈업한 것인데, 친절이라는 로고와 함께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독수리, 월계수 입 자수가 새겨져 있다. 50x45cm 패널들 안에 가득한 모자는 그 주인들 없이도 인사할 때의 각도로 배열되어 있다. 모자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실존 인물이나 실제 모델에 근거하지 않은 요즘 작품은 그 또래 그 직종의 아저씨에 대한 유형화에 가깝다. 여럿이 같이 등장할 경우에도 그들의 표정은 비슷하며, 가족 유사성을 가진다. 여러 명이 등장하지만, 다듬지 않은 눈썹, 늙어서 처진 눈 등 공통부분을 모두 겹치면 결국 한명일 수도 있다고 작가는 밝힌다. 눈썹을 빼면 남녀를 초월해 중성적인 이미지에 가까우며, 범인 몽타주처럼 불특정한 인상이다. 안경도 모자만큼이나 그들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얼굴형과 어울리지 않는 안경 형태나, 렌즈에 붙은 상표도 떼지 않고 쓰고 있는 무감각함, 그리고 안경 너머로 흐릿하게 비추어지는 눈길을 강조한다.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금속 테는 가끔 같이 등장하는 금니와 더불어 이물감을 주는 소재이다. 묘사력이 전혀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부분들 사이의 괴리감이 나타나는 것은, 정유미의 그림이 초상화와는 달리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한 그림이며, 정형화된 인물들의 공통된 표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는 그들의 이중성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지만,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 것은 형식적인 장치에 힘입은 바 크다. 물을 뿌리고 옅은 먹으로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방식으로 피부의 깊고 섬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 안경이나 금니 같은 악세사리를 주로 표현하는 아크릴은 먹처럼 스며들기보다는 표면을 덮어가는 것으로서 강한 평면성과 인공성을 띈다. 서양화법과 동양화법의 공존은 자신의 전공과 자신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주변 환경과 문화를 모두 염두에 둔 결과이다. 정유미는 철저하게 자신과 친숙한 일상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한다. 그림은 일상을 한꺼풀 벗겨보는 행위에 해당한다. 작가는 사물과 인물의 배치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핵심적 진실을 들추어낸다.

정유미의 방식은 초상화법같은 전형적인 미술의 장치보다는, 과학자처럼 분석하고자 하는 바를 현미경 위에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얼굴의 생물학적 기원은 아가미라고 한다. 심리학자 존 리겟에 의하면 원래 물을 펌프질하는데 쓰였던 아가미 근육은 두개골 전면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근육 막으로 천천히 변형되어 인간의 얼굴이 되었다. 14개의 각기 다른 뼈가 얼굴을 지탱하고 있으며, 얼굴 표면 바로 밑에는 백 개가 넘는 근육이 깔려있다. 이 근육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가로지르며,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작은 공간에 밀도 높은 장치들이 몰려 있는 얼굴은 전 지구상의 모든 인간 수만큼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또한 얼굴이란 단어의 어원은 그것의 상호성을 알려준다. 니콜 아브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프랑스어 얼굴visage이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원래 얼굴은 보는 능력,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의 겉모습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얼굴은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을 의미한다.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고, 타인이 나에게서 보는 것이 얼굴의 원뜻이었다. 정유미의 작품에 나오는 얼굴은 얼굴의 생물학적, 어원적 의미에 나타나듯이, 다양한 인간의 얼굴이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라는 것과 시선의 상호성에 내재된 사회적 의미를 지적한다. 사회성은 생존이라는 원초적 진실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이다. 생존을 위한 매진은 직업적인 표정을 만들어내고, 상대의 표정을 제대로 읽고 파악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직업적으로 상대에게 친절한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적이고도 반사적인 행동은 그들이 걸치고 있는 제복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자동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틈과 괴리를 발견한다.

인간은 시스템이 아무리 강요해도 완전한 자동인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어정쩡한 표정은 극히 인간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 엷은 먹으로 세심하게 발색된 피부는 그들의 위선적인 표정마저도 인간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악세사리들은 그들이 속한 시스템의 취약함을 알려준다. 표면이 강조되어 있는 모자나 의상, 배경의 공백은 화면에 바짝 붙어있으면서 관객을 압박한다. 거기에는 피부와 같이 끊어졌다가도 연결되는 부드러운 굴곡이 아니라, 단절성이 두드러진다. 안경의 경우 얼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모자의 경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와 상징들이 모여 있다. 그가 속한 체제의 증거인 부속품들은 거의 무원칙적인 잡다함이라는 점에서 키치적이다. 그것은 얼굴의 본질이나 유기적인 질서를 와해시키고 조잡한 대상에 근접시킨다.

취약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인 인간은 시스템이 강요하는 동일성의 논리에 완전히 귀속될 수는 없으며, 작가는 이들을 통해 체계와의 동일화 과정에서 개입될 수밖에 없는 균열을 나타낸다. 정유미의 그림에서 보일듯 말듯 실룩거리는 입은 인물에 나름의 생기를 준다. 가늘게 뜬 눈 또한 마찬가지이다. 눈과 입은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눈과 입은 숨기면서도 드러내는 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비틀린 웃음과 가려진 눈은 상대에 대한 공격성을 감추면서도 드러낸다. 얼굴 자체가 가면처럼 감추기와 드러내기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무언가에 비추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볼 수 없는 인간은 상대를 통해 자신을 본다. 시선과 욕망 그리고 권력은 연결되어 있다. 타인을 직시하는 눈에 대한 암묵적인 금기가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 그림들은 타인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가 보고/보이기라는 게임에서 문화적 권력--정치적, 경제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는--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