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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mi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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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정유미 작가와 김성우 큐레이터가 초기 작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작가의 관점, 태도, 창작의 과정을 훑으며 나눈 대담입니다.
C – 정유미 (작가)
K – 김성우 (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K : 작가님의 초기작으로부터 본 대화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초창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을 비교해 보자면 주제나 소재, 그리고 형식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보입니다. 물론 작가의 작업을 작품의 외적 이미지 차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내적 동기나 주요 관심사, 태도 등은 현재와 사뭇 달라 보입니다.
제가 작가님의 작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지금은 사라진, 하지만 의미 있는 미술 공간이었던 갤러리 킹에서였습니다. 당시 작가님은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와 함께 꽤 직설적인 언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사회 속 소외된 타자-아파트 경비원, 버스 운전기사 등-의 모습에 주목하고, 그들의 웃음, 더 정확히는 웃음으로 대변하는 ‘친절’이라는 표면적 제스처 아래 감춰진 모순된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어쩌면 ‘친절’이라는 표면적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타인의 불온한 감정이라든가, 혹은 온전할 수 없는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든가,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책임의 폭력성 같은 것을 상기하게 합니다.
C : 갤러리 킹에서 2008년 <<친절한 인사>>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스스로의 감정을 가리거나 무시한 채 ‘친절함’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통이 차단된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어색하고 어정쩡한 표정’을 표현한 인물 작업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 작업은 직접 관찰했던 경험담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버스 종점을 시작으로 1시간가량 거의 날마다 버스 기사님 바로 뒷좌석에 앉아 기사님과 승객이 인사하는 광경을 관찰했습니다. 정거장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친절히 인사하는 기사님과는 달리 거의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고, 어린아이만 겨우 인사에 답하는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할 때, 말로만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전혀 친절하지 않은 모습을 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마일마스크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있을 정도로, 이미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춰가며 속앓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의 겉모습과 표정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전체적인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은 가리고 싶으면서 동시에 타인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심리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소통이 단절된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하다 못해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그 상황을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불편해 보일 수 있는 어정쩡한 표정의 인물들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잊고 있던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건네고자 했습니다.
(도판1)
(도판2)
K : 당시의 작업은 전체적으로는 흑백의 톤으로, 그리고 거기에 살짝 덧대어진 채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더 정확히는 핏기 없는 흑백의 얼굴에 개개인의 외피를 둘러싼 의복이나 장신구에는 채색을 하는 것이 주요 표현 방식이었지요. 이러한 무채색의 표현은 개인 고유의 정체성을 약화하는 동시에 군중 속 누군가로 익명화하며, 오히려 안경테, 모자, 의복 등의 장식에 채색함으로 개인에게 부과된 사회적 지위나 책임에 시선이 향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질성, 낯섦, 혹은 섬뜩한 인상까지도 주며 개인과 사회 사이 알 수 없는 불편함을 가중하곤 합니다.
C : 모노톤의 얼굴 표현은 장지에 옅은 먹을 우려 표현하는 방식-종이를 분무기로 적신 후 점진적으로 먹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단편적인 겉모습이 아닌, 사람의 피부 느낌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함으로 실제 인물과 그의 표정을 마주하는 듯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대상의 주름이나 생김새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표정이 드러내는 인상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먹의 번짐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제가 의도하는 바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자 인물의 표정에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이었고, 그 상황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지만, 동시에 타인을 주시하려는 상황을 얘기하기 위해, 검은색 선글라스와 같은 장식 뒤로 자신의 시선을 숨긴 사람들을 표현했습니다. 안경, 모자, 의복은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물건이지만, 그 용도 이외에도 부가적인 의미 및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이를테면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목적을 넘어 누군가에게 더 돋보이고 싶을 때 이용되기도 합니다. 여러 작품들에 등장하는 ‘친절’이라는 글자는 실제 반장 경비원의 모자에서 쓰여있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먹과 분채 물감을 동시에 사용하여 은은한 얼굴 표현과 선명한 모자의 표현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작품에서의 생략과 과장의 선택적 구성 및 표현 방식은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자 불편한 현재의 모습에 더욱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위해, 어색함을 더욱 극대화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도판3)
(도판4)
K : 한편으로 이러한 화면 위 인물의 모습들은 일종의 해학적 제스처로도 보입니다. 해학이란 현상을 둘러싼 구조나 문제점을 드러내는 꽤 효과적인 방법론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작가 스테이트먼트에서 “해학적인 표현은 그러한 충돌에서 빚어진 모순된 사회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단절된 소통의 언어를 찾는데 더욱 용이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듯 말이죠.
C : 네, 맞습니다. 단순히 무거운, 문제의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인 제스처가 아닌, 유턴해서 부드럽게 나아가는 방식으로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같은 작품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뉘앙스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키치적 해석에는 선을 긋기도 했습니다. 작업을 할 때 무엇인가에 최대한 몰입하게 되면, 이성적인 접근보다 본능적인 감각에 맡겨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품에서의 해학적인 표현은 실제 동기부여를 받았던 작품 속 인물이 실제 착용했던 모자, 선글라스, 돋보기, 금니 등으로부터 영감받아 시작된 것입니다. 평소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며 실제 궁금했던 점에 관해 반장, 경비원, 버스나 택시 운전기사와 직접 대화하고, 거기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들을 작품에 그대로 부각했습니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가벼운 시각적 즐거움의 충돌을 연출한 것입니다.
K : 거칠게 축약해 특정 시기의 미술을 간추릴 수는 없겠으나, 예술은 고유의 매체 차원의 실험과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정치적 예술이라는 두 개의 축 사이를 오가며 발전해 온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2010년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동시대 미술계에서 구체적인 형상 이미지와 사회 참여적 발언의 양상을 띠는 작업이 조금 더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화를 기반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님께서는 웃음, 인사, 그리고 특정 직군의 코스튬으로 대리하는 사회 심리적 가면, 그리고 개인성이 상실된 군중의 핏기 없는 모습에 집중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본성, 본모습 대한 관심인가요? 또는 사회 비판적 입장에서의 시선인가요? 그 시선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C : 시선의 시작은 소통이 단절된 인사를 주고받는, 형식적인 인사에 그치는 어색한 상황들에 대한 주목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에 물음을 던지며 시작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적 습성에 대한 물음과 우리는 왜 누군가에게 친절을 요구받으며, 그것은 어디서부터 학습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불편한 상황을 서로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고, 너무나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며 무의식중 의미 없는 인사를 하는, 예의를 지키기 위한 어느 정도의 습관에 자신의 행동을 내맡겨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고, 내비치는 것과 가려지고 감추어진 것의 이면을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K : 기존 비평에서 작가님을 ‘문화관찰자’로 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연유에는 운전기사, 경비원, 판매원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지만,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에 다가서기는 어려운 서비스 직군에 주목하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부과된 선입견, 그러니까 ‘아저씨’로 통칭하는 직군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의 기호로서 인물을 다룬다는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 : 저는 작업을 할 때 직접적인 주장보다 어떠한 상황인지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직접적이기보다 약간 비틀고 돌려 제시하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즉, 화자나 청자와 같이 직접적인 주체자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 화자와 청자 사이에서 다뤄지는 언어와 행동을 그 외부, 제삼자의 입장에서 천천히 세심하게 관찰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단순히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수동적인 시각으로 관찰하는 개념을 넘어, 저를 포함한 우리가 당연시하며 행하는 행동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어떠한 연유로 이렇게 행동하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하며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관찰하고자 했습니다. 불편하거나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또는 모습을 발견하면,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겉으로 드러나기까지 그 기저에 깔린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추적해 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과정 및 작업 태도를 일컬어 ‘문화관찰자’라고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경비원, 운전기사는 저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어색하고 어정쩡한 표정이 드러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상황에 주목했고, 인사를 많이 해야 하는 상황과 대상에 집중하게 되니, 경비원, 운전기사와 같이 평소 가까이 만날 수 있었던 분들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는 특정 직업군을 얘기하려는 의도이기보다는, ‘아저씨’로 대변되는 대상의 기저에 깔린 사회적 학습들에 주목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사회 경험으로 인해 얼굴의 근육이 자리 잡힌, 다시 말해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얼굴에 드러나는 굳은 표정이 다른 대상보다 더 잘 보이는 이들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K : 개인의 정체성이 삭제된 군중의 ‘친절’을 앞세운 모습(<<친절 학습>>(2008), <<친절한 인사>>(2008))는 <<스마일 마스크>> (화봉갤러리, 서울, 2011)에서 선보인 연작에서 개인(혹은 특정 관계의 소수 집단)의 초상으로 이어지며, 조금 더 직설적인 차원에서 ‘웃음’이라는 키워드로 묶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에게 강요되는 ‘웃음’과 ‘웃음’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맥락, 그리고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 혹은 집단 사이의 괴리에 대한 문제를 환기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을 마주하는 관객이 화면 안 인물들 사이에 언제든 있을 수 있다는, 혹은 화면 속 인물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작금의 현실을 꼬집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C : 초창기의 <<친절한 인사>>, <<친절학습>> 개인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상이 경비원, 버스 기사, 택시 기사였지만, 그 이후 2011년 <<스마일 마스크>>는 제가 아는 지인들로 구성된 인물들이 작품에 등장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특정 감정을 느낄 때 어떤 표정과 말투로 그것을 표현하는지 모르는 데 반해, 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나이나 성향, 직업 등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그들의 내밀한 표정과 행동에 어느 정도 다가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촬영했을 당시, 실제 인물에게는 처음에 사진을 찍겠다고 하고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최대한 잘 웃고, 잘 정리된 표정을 지은 후 급격히 바뀌는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촬영 후, 자세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 다음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위트 있는 표정으로 해석되는 <<친절한 인사>>, <<친절학습>>의 연작에서 더 나아가 <<스마일 마스크>>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우리들의 다큐멘터리 같은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개인을 말하려 하기보다 조금 더 큰 범위로 확장해, ‘지금 우리, 나의 표정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작업을 지속하며 제 생각과 시선이 변화하고 옮겨 가는 것처럼, 제가 주목한 것들에 대한 시선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도판5)
(도판6)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의 작업은 특정 직업이나 특정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한국 사회의 문화를 더욱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너무 무겁게 또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트는 중요합니다. 또한, 실제 참고한 인물 대상이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지는 않습니다. 즉, 제가 강조하고 싶거나, 생략하고 싶은 것을 조절하며 인물을 그렸습니다.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사람들을 참조해 그렸지만, 때로는 비슷한 표정들의 모습을 띠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의 초상화가 아닌, 지금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도 그 인물이 되거나, 그 인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느낌이 들도록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그렸던 당시와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을 생각해 볼 때, 10~15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그림 속 인물은 여전히 ‘현재의 나’ 일 수 있고,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그것이 자신의 모습일 수 있음을 돌이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있음을 상상합니다.
K : 2013년의
(도판 7)
(도판 8)
C : 초기 인물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떠한 문제의식을 단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해보고 싶은 또 다른 작업이 많았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한 동양화 재료를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고, 익숙한 재료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 방식 및 접근 방법에 한계를 느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작업 발전을 위해 2012년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런던으로 옮겨가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가 실제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런던 유학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낯선 환경에서 자발적으로 관심사를 다시 찾아가고 실험하는 과정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환경이 변화하니 주변에 대한 관찰, 시선, 관심 등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에서 새롭게 발견한 관심사는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다양한 색상과 투명도의 비닐봉지로부터 시작합니다. 비닐봉지의 색상은 브랜드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서, 사회적 계층 등의 인식을 내재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물리적 공간에서 가리거나 경계 짓는 ‘막’의 기준이 한국과 크게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공간의 안과 밖, 물리적 ∙ 심리적 경계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반투명 유리의 화장실 문, 가리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은 정도로 얇은 커튼 등 외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문화적 환경을 접하며, 기존에 제가 얼마나 ‘가리고 감추는’ 시선에 집중했는지 돌이켜 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 1층에 어렸을 적부터 살았기 때문에, 커튼, 블라인드, 시트지, 버티컬 등 베란다를 완벽히 가리려 했던 부모님의 노력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런던에서 일상 속의 느슨한 가림막, 또는 막이라고 하기 어려운 형태로 경계에 위치하는 설치물,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적 기호처럼 작동하는 표면의 형식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적 차이의 경험, 환경과 조건의 변화가 생각의 전환 및 관점의 확장을 시켜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K : 재료 측면도 흥미롭습니다. 이전에는 한국화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재현으로서의 회화를 추구하셨다면,
(도판9)
C : 유학 이전에는 한국화를 전공하고 오랜 시간 동안 거의 한국화 재료만을 사용했었는데, 습관적인 재료 선택이 아닌,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세련되지는 않아도,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닌, 실패하더라도 계획을 직접 실천으로 옮겨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전에는 평면 작업만 했었기 때문에, 사고방식 또한 평면 회화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간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평면에만 머무를 수 없었기에 평면 작업에서 공간으로 확장되어 설치로 진행될 때 작업의 구조적인 계획 및 방법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서툴지만 직접 여러 재료를 선택하고 만들어 갔습니다. 특히, 여러 방식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영국 미대의 다양한 워크숍 환경이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페브릭 워크숍에서 비닐봉지와 천을 직접 미싱질해서 설치해 보며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미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재료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사용하는 오브제 자체도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지체에 물감을 칠해야만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닐봉지를 프레임에 씌워도 페인팅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닐봉지의 물성, 즉 색상, 투명도를 함께 이용하여 회화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K : 과거와는 다르게 다소 추상적인 형식으로 진화한 작업은 그 대상을 화면 밖 외부에 두지 않는 것만큼이나 화면 내부에 상상적 공간의 구축, 혹은 전시 공간을 활용한 설치의 형식으로 확장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예시는
(도판10)
(도판11)
C :
K :
C : 저는 실제 머무는 장소와 주변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판12)
K : 과거나 지금이나 꾸준히 유지하시는 어떤 작가적 태도가 분명히 엿보입니다. 정확히는, ‘관찰자’로서의 태도인데요. 이를테면 과거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으로서 타인을 관찰하고 그들의 사회적 행동양식을 관찰하여 이후로는 특정 장소나 지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특정 공간의 형식이나 환경, 조건을 관찰하고 이를 작가 자신의 기억이나 인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C : 어느 한 장소나 사회에 속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전체적인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관찰자로서 발견하는 시선을 작품에 담아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된 태도이기도 합니다. 초기 인물 작업은 이야기가 쉽게 전달이 되는 직접적인 방식을 취했다면, 점차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장거리를 최소시간으로 가는 길과 천천히 가는 길이 있는 것처럼, 시각언어가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힘을 믿고 시도해 가고 있습니다. 관찰자이지만, 좀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K:
C : 말씀하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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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4)
(도판15)
(도판16)
K :
(도판17)
C :
K :
C : 저는
(도판18)
K :
C :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완성한 후에 돌이켜보니,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 그리는 행위와 표현 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어렸을 적부터 동양화를 배운 저에게 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궁금증을 비롯하여, 살아있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 방법은 미동이 느껴질 정도의 부드러운 표현이 가능한 동양화의 채색 방법이었습니다. 의식하기 전에, 이미 제 손은 움직이고 있었고, 다시점과 같은 전통 동양화의 화면 구성이 자연스럽게 다시 제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는 저에게 기억과 상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K : 기억에 기반하여 자신이 존재했던, 그리고 맞닥뜨린 지난 시공간의 재현은 특히 더 촉각적인 측면의 강조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도판19)
(도판20)
(도판21)
C : 맞습니다. 부드러운 촉각적 느낌을 부각해 표현하는 것은 제가 의도한 정서적 측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마주했던 대상을 보이는 형상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마주했던 상황(햇빛, 온도 등의 날씨 포함)과 제가 실제 느꼈던 감정을 반영한 것이기에 더욱 촉각적 표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부정적 느낌보다는 소망과 같이 긍정의 에너지를 건네는 대상으로써, 이러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보다 부드럽게 대상을 부각시켜 표현하기도 합니다.
K : 이러한 감각을 통한 정서의 재현은
C :
(도판22)
(도판23)
K : 최근의 작업 <물과 섬>(2021) 연작에서 작가님은 특정 장소를 탐방하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풍경을, 더 정확히는 ‘상상’의 풍경을 그려 내었습니다. 여기서도 앞서 말한 ‘관찰자의 태도’, 그리고 재현을 위한 ‘기억’의 적극적 활용 등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태도와 방법론 아래 창작한 작업은 더 이상 실재하는 풍경이 아닌, 완전한 추상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현 대상과 관찰자 사이 시선의 거리를 절묘하게 조절하며, 기억을 매개로, 해당 장소에 심리적으로 깊이 다가섰던 인물이자 관찰자로서 거리를 두는 시선 사이를 오갑니다. 그리고, 동양화의 ‘진경’과 같이 그때의 경험에 대응하는 감각으로 충만한 (추상적) 풍경의 화면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C : <물과 섬> 시리즈 이전,
(도판24)
(도판25)
K : 이번 <<바람>>(금호미술관, 서울, 2023) 전시에 대한 인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경험한 장소나 대상에 대한 인상을 감각으로 번역, 전환하여 다소 평면적인 대상으로 치환, 그려내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마치 원경의 풍경을 담아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천천히 가자>(2022) 나 <부드러운 호흡>(2021), 그리고 <물과 풀이 바람과 마주할 때>(2023)와 같은 작업은 마치 동양화에 담긴 시선, 그중에서도 심원법이라든가, 혹은 고원법 같은 것이 느껴지며, 이전에 없었던 풍경의 깊이와 공간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도판26)
(도판27)
(도판28)
C : 최근 강릉 레지던시를 참여하면서 동해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느낀 경험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물과 섬>(2021) 시리즈 이후, 강릉에서 바다, 남대천, 호수, 습지, 저수지 등 다양한 물길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또한 바다의 맞은편 방향으로 바라볼 때 보이는 대관령을 매우 가까이 접하게 되면서, 관심이 ‘산’의 영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시선이 산세를 따라 움직이며 수직적 방향으로 확대되었고, 남해와 다른 동해의 풍경이 자아내는 장면들이 작업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수에서 대상을 수평적 시점으로 바라보았다면, 강릉에서는 수평적으로 바라보는(평원 平遠) 바다뿐만 아니라, 바다 시점에서 올려다본(고원 高遠) 대관령의 풍경, 이와 반대로 대관령의 목장, 옛길 등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 바라보는 (심원 深遠) 풍경을 접하면서, 여러 시점에서의 대상에 대한 관찰이 그림에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풍경의 깊이와 공간감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가자>(2022)의 경우, 정동진의 바다부채길을 다녀온 후 영감을 받아 시작한 작품입니다. 작품을 그리는 동안 대관령을 다녀왔고, 산과 목장에서 내려다본 동해안의 모습이 추가되어 표현되었습니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직 현장의 기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그려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여러 시점이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물과 풀이 바람과 마주할 때>(2023) 작품은 강릉에서 마주한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 깊은 수심의 요동치는 파도, 안목해변에서 대관령을 바라볼 때 노을 질 무렵의 빛과 산세가 만나 서로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황홀한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한 화면에 보일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의 풍경들이지만, 기억 속의 장면들을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재구성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실재와 기억, 상상 사이에서 특정한 상황과 순간을 떠올려 장면을 구성하고 또 다른 풍경의 깊이를 조율하게 됩니다.
K : 작가님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깊이 받아들이고, 대상의 표현에 있어서 촉각, 청각, 후각, 시각의 공감각을 통해 현장에서 인지했던 감정과 마음속의 형상을 짚어가고자 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의 표현의 변화, 특히 다채로운 색의 사용은 이전과는 다르게 화면 속에 모종의 리듬을 부여하는 듯도 합니다. 큰 붓으로 짧게 그려내어 다채로운 색감과 함께 미세한 율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 방식은 이전의 평면적 대상에는 없던 운동감과 역동성까지도 창출하는 것 같습니다.
C : 강릉 현장에서 촉각, 청각, 후각, 시각의 공감각을 통해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동세(動勢)’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강릉에 머물렀던 시기가 8월 한여름부터 폭설이 내린 한겨울까지 봄을 제외한 푸르른 여름, 단풍이 든 가을, 생각보다 따뜻한 겨울까지 였습니다. 그 계절의 변화를 직접 관찰하며 느낀 것들이 그림으로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다른 온도, 바람, 공기에 따라 달리 보이는 다채로운 자연 색상들을 관찰하고 느꼈기 때문에 작품에서 색 사용의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큰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와 나와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그림을 그릴 때 붓의 터치 및 속도, 팔의 움직임이 커지면서 더욱 적극적인 운동감이 전달되어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반영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전 그림들에서 잔잔한 율동이 느껴졌던 이유는 남해 여수의 잔잔한 물결과 윤슬,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의 고요한 자연환경이라는 공통점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달리, 동해 강릉은 산과 바다 어디서든 거센 바람을 마주하게 되고, 물과 풀은 그 강한 바람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러한 현장에서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역동감 및 색상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K : 작가님이 현재 집중하는 것은 추상화된 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에 이렇게도 몹시 구체적인 ‘바람’이라는 제목을 붙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특히나 어떤 언어로 대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감각을 하나의 이미지에 귀속시키곤 합니다. 그렇다면 추구하시는 공감각적 인지 현상과는 조금 어긋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C : 최근 여수와 강릉에서 물길을 따라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바람’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시 제목인 ‘바람’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이기보다 열린 개념으로 사용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개인마다 모두 다른 바람을 느끼게 되니까요.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고, 머리카락이 날리듯이 시각, 촉각, 청각 등을 중심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바람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과 감정을 느꼈던 그 시간과 순간을 기억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저는 ‘바람’이 전해주는 전체적인 상황을 인식하고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때의 빛과 공기의 온도, 습도, 향에 따라 특정 색상들이 연상되고, 추상의 무엇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며 떠오릅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동시에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추적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상을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학습한 대상과 언어를 바탕으로 공통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저는 이와 반대로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귀속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상에 대한 학습된 논리 및 규칙을 무한 해체하고, 온전히 대상 그 자체를 느끼고 반응하며 기억하고 연상되는 것을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이미지를 재조합하여 상상해 나갑니다.
K : 마지막 질문으로, 대상의 현상-표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대상과 마주하면서 대상이 자신에게 건네는 어떤 이야기를 찾아내고자 한다고 했던 작가님의 얘기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위로일 수도, 혹은 작은 희망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 그리고 이글을 마주하는 독자를 위해 작가님이 상상하는, 그리고 전달하려는 그 얘기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C : 작업 활동 초기에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문제를 들여다보고, 대상을 의도에 따라 해석하며 작업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6년 노르웨이 레지던시 참가를 계기로 대상을 마주하는 자세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그 당시 관심사였던 ‘경계’의 영역이 세계 어느 곳이든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던 생각은 웅장한 대자연 앞에서 무너져 내렸고, 당시의 모든 작업 계획을 일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넓은 세상을 좁은 시야로 바라보고 편협한 방식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것을 자연을 통해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숨이 멎을 듯한 고요함 속에서 머리가 아닌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와 마주한 대상에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 듣고, 느끼고자 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가시적 대상이 존재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시각언어로 드러내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는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 것이 제 관심사였다면, 지금은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냐를 넌지시 제시하는 것이 더 주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답답한 현실에 불만을 표출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상상 풍경을 제시하며 위로나 소망을 건네고자 합니다. 이는 오직 상상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 존재하고 곧 실현 가능한 이상세계이며, 마음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길든 생각과 행동에 의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감추기 바쁩니다.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 또는 독자분들께서 자신이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잊고 살아가는 현재를 돌아보며, 짓눌린 신경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감각과 무뎌진 감정에 호흡을 불어넣어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가 자연을 가까이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영감을 받으며, 그 자연으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공감각으로 느끼고 걸러내어 상상 풍경으로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